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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만공선사

진흙소의 울음 泥牛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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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03.01.12 조회6,84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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泥牛吼

 
夫叅禪者, 第一怕怖着, 無常迅速, 生死事大.

故, 古人, 云, 『今日雖存, 明亦難保, 緊緊念着.』 少無放逸.

次於一切世事, 闊若無些少干意, 寂然無爲, 乃可耳.

若乃心境, 相蕩, 如薪火相交, 紛紛汨汨, 過了歲月, 此非特有妨於擧話分上, 而黑業, 漸增矣.

最要的, 無心於事, 無事於心則, 心智自然淸瀅, 萬類皆隨心造作, 作善, 生天堂, 作惡, 現地獄, 狠惡, 成豺狼, 愚蠢, 作蚯蚓, 輕忙, 就蝴蝶, 故, 古人, 云, 『只因一念差, 現出萬般形.』

夫虛其心, 惺惺粹一, 不搖不昏, 曠然虛豁, 更向何處覓生死, 何處覓菩提, 何處覓善惡, 何處覓持犯?

秖這是活潑潑, 明歷歷底, 透頂透底, 不隨生生, 不隨滅滅, 不作佛, 不作祖, 大包沙界, 小入微塵, 又能佛能生.

又非大小, 非方圓, 非明暗, 自在融通, 徹底恁麽, 更非小分, 强做的道理. 夫叅此玄門者, 常務返照, 究之用心, 惺密無間斷, 究之至切, 至於無用心可究之地, 驀然心路忽絶, 踏着本命元辰, 秖這本地風光, 本自具足, 圓陀陀地, 無欠無剩, 到恁麽時, 應耳時, 如百千日月, 照耀十方, 應眼時, 如鹹海風浪, 聲振須彌, 不是强爲也. 這箇道理, 只爲太近, 所以, 人自不得體解也.

凡欲叅玄者, 着實理會, 返照法式, 分明形容, 得細審不鹵莽, 用意行之, 行之功熟, 實相之理, 自現, 太古和尙, 云, 『才擧箭沒石.』 淸虛和尙, 云, 『如蚊子上鐵牛, 向下嘴不得處, 和身透入.』擧話頭參究者, 當以斯言, 爲指南.

若論日用萬行, 胸次空明無物, 六根, 虛豁地者, 秪這是寬曠的, 便是布施, 秪這是淨澄的, 便是持戒, 秪這是虛柔的, 便是忍辱, 秪這是本明, 常現不昧底, 便是精進, 秪這是明寂不亂, 便是禪定, 秪這是明寂了了, 擇法觀空底, 本自無痴底, 分別諸法相, 而不動底, 乃至隨順世緣, 無障無碍底, 便是智慧. 故, 達磨大士, 云, 『觀心一法, 摠攝諸行.』 但務培養根株, 莫愁其枝不茂.

但知見性作佛, 莫愁佛無神通三昧. 今人, 多分不得叅學眞正道人, 本色衲子, 於佛法中, 法理不明, 道眼, 不實, 都是亡羊岐路, 如醉如夢, 過了一生, 悲夫.

洞山和尙, 所謂, 『袈裟下, 失人身, 是苦者.』 此也. 夫行道路者, 若初步, 不得其正, 千里之遠, 徒費功力, 不如不步之爲愈.

故, 圭峯禪師, 云, 『決擇分明, 悟理應修.』 夫欲起三間茅屋, 若不得準繩斲斫尺量之巧, 且不成就, 况造得圓覺大伽藍者, 不由其造之之理, 而成功乎哉.

欲造乎小事則, 恐其差錯不成, 思得其理. 未者, 問於人, 未分明, 更問於他有智人, 期不差錯就功, 而欲造詣乎.

玄妙之道者, 擧是率爾泛忽, 未見其仔細決擇用功者也, 如此而不顚功敗績者, 幾希矣.

嗚呼, 可不戒哉.

夫欲誡無常, 悟明大事者, 不急尋師, 將何鎰其正路哉.

 
진흙소의 울음 


대저 참선하는 이는 첫째로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큰 것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은 비록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금도 방일함이 없어야 한다.

다음에는 온갖 세상일에 조금도 간섭하는 뜻이 없이 오직 적연 무위(寂然無爲)해야 할 따름이다.

만약 마음과 경계가 서로 부딪쳐서 섶나무에 불이 타는 것 같이 번잡스럽게 세월을 보내 버리면, 이것은 특히 화두 드는 공부에 방해로 울 뿐 아니라 검은 업보만 더할 뿐이다.

가장 요긴한 일로는 모든 세상사에 뜻이 없게 하고, 마음에 일이 없게 한즉 마음의 지혜가 자연 맑고 빛나 일체 만사가 다 마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선행으로 천당에 나고, 악행으로 지옥에 나타나며, 포악하면 범과 이리가 되고, 어리석으면 지렁이와 곤충이 되며, 가볍고 바쁜 것은 나비로 나타나나니,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되 『다만 한 생각이 잘못됨으로써 만 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하였다.

대저 그 마음을 텅 비워서 깨끗하고 순일하여 흔들리지도 않게 하고, 혼미하지도 않게 해서 허공과 같이 훤칠히 하면 다시 어느 곳에서 생사를 찾으며, 어느 곳에서 보리(菩提)를 찾으며, 어느 곳에서 선과 악을 찾으며, 어느 곳에서 계(戒)를 지니고 범하는 것을 찾겠는가?

다만 이 활발하고 역력히 밝아 근원에 사무치면, 생함에 따르지 아니하고, 괴멸해 없어져도 없어지는데 따르지 아니하며, 부처도 작하지 아니하며, 조사도 작하지 아니하며, 크게는 모래 수 같은 세계를 둘러싸고, 작게는 가는 티끌에 들어가며, 또한 능히 부처며, 능히 중생이다.

또 크고 작음도 아니며, 모나고 둥근 것도 아니며, 밝고 어두운 것도 아니어서 자재 융통함이 이렇게 철저하여 조금도 강제로 만들어 내는 도리가 아니다, 대저 이 현묘한 문을 참구하는 이는 늘 그 참구하는 마음을 반조하고 힘써서, 성성하고 밀밀하여 간단함이 없이 하며, 참구하기를 지극히 간절히 하여 참구한다는 마음조차 다하여 없는 데 이르러서 홀연히 마음 길이 끊어져 근본 생명 자리에 이르게 되면 저 본지 풍광(本地風光)이 본래부터 구족하여 뚜렷한 경지라, 모자랄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나니, 이러한 때에 이르러서 백천 일월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밝게 빛나며, 귀에 부딪힐 때에는 짠 바다의 풍랑 소리가 수미산(須彌山)을 치는 것도 일부러 함이 아니다. 이 도리가 다만 지극히 가까와서 사람이 스스로 체험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무릇 현현한 이치를 참구하는 이가 그 착실히 참구하는 반조 방법을 알아 얻을 것 같으면, 분명히 마음자리의 형용을 자세히 살펴 낼 것이고, 아무렇게나 마음을 써서 행하지 말 일이다. 행하는 공이 익어지면 실상의 이치가 절로 드러나리라. 태고 화상(太古和尙)이 이르기를 『화살을 쏘자 돌을 뚫는다.』하였고, 청허 화상(淸虛和尙)이 이르기를 『모기가 쇠소(鐵 牛) 등어리를 뚫는 것과 같이, 부리가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라.』하였으니, 화두를 참구하는 이는 마땅히 이 말로써 지침을 삼을 일이다.

만약 일용의 만행(萬行)을 논하자면 가슴 속이 비고 밝아서 아무것도 없으며, 육근(六根)이 텅 비어서 다만 너그럽고 빈 자리가 바로 이 보시(布施)며, 다만, 저 깨끗하고 말쑥한 것이 곧 이 계를 지니는 것(持戒)이며, 다만, 이 비고 부드러운 것이 이 욕됨을 참음(忍辱)이며, 다만 저 본래 밝은 것이 항상 드러나서 어둡지 않음이 곧 정진(精進)이며, 다만 저 밝고 고요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선정(禪定)이며, 다만 저 밝고 고요하여 분명하여서 법을 가려내어 공(空)을 관(觀)하되 본래 스스로 어리석음이 없으며, 모든 법을 분별하되 움직이지 아니하며, 이렇게 세간(世間)으로 수순(隨順)하되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는 것이 문득 이 지혜(智慧)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達磨大師)께서 이르기를 『마음 보는 한 법이 일체 행을 다 섭하였다.』하셨다. 다만 그 뿌리와 목체를 잘 배양할지언정 그 가지와 잎이 번성치 않음을 근심하지 말라.

다만 견성성불을 할지언정, 부처님의 신통 삼매가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요새 사람들은 다분히 진실하고 바르게 닦아 가는 참학을 다하지 못함이라. 본색 납자(本色衲子)가 저 불법 가운데 법의 이치를 밝히지 아니하고, 도의 안목도 진실치 못하여 도무지 갈림길에 염소를 잃은 것같이 마치 취한 듯 꿈꾸는 듯 일생을 헛되이 지내 버리나나, 슬프다.

동산 화상(洞山和尙)이 이른바 『가사(袈裟) 아래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함이 이것이다.

대저 길 가는 사람에게 첫 발길이 바르지 못하면 천리 먼 길을 공력만 허비하므로, 길 떠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규봉(圭峯) 선사가 이르기를 『결택(決擇)하기를 분명히 하고, 이치를 깨달아 닦을지니라.』하였다. 대저 三간 모옥(茅屋)을 일으키고자 하더라도 만일 먹줄 치고 자귀로 깎아 내고 자로 재는 일의 공력을 드리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하나니, 하물며 원각의 큰 절(圓覺大伽藍)을 조성하는 데, 그 조성하는 이치대로 하지 않고 어찌 성공하겠는가.

작은 일을 하고자 하는 데도 잘못되어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그 이치를 생각해 얻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이는 선지식(善知識)에 물으며, 물어도 모르거든 다시 슬기로운 명안 종사(明眼宗師)를 찾아서 기어이 잘못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현묘한 도에 나가고자 하는 이들 거개가 함부로 소홀히 하여 그 견해를 자세히 결택하지 않고 공부하는 경우에 이와 같은 데 거꾸러지지 않는 이를 보지 못하였고, 이렇게 하고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슬프다.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대저 무상(無常)을 경계하고 큰일을 깨달아 밝히고자 하는 사람으로,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장차 어찌 그 바른 길을 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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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님의 댓글

이미혜 작성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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